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음. 그러나 그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진압하면서 3,000명이나 되는 이들을 학살하는 등, 강경한 통치를 함. 그는 결국 유대인 사이의 문제를 원만하게 이끌어내지 못했고 로마에 의해 갈리아 지역으로(오늘날 비엔나) 추방당하였고 코포니우스 총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고, 아켈라오에 비해 그의 통치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음. 그는 자신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스(헤롯 아리스토불루스의 딸)를 이혼시키고 혼인을 함. 이 결혼은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였음. 특히 세례 요한이 이를 비난하였다가 투옥되어 처형당하였음.
그는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떠맡겼던 자였고, 나중에 교회 공동체 내에 그의 젖동생(아마도 친구) 마나엔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함.
그는 통치 중반기까지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 그는 갈릴리 지역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이 기념이 되는 도시 티베리아를 건설하였음.
헤롯 안티파스는 말년에 자신의 조카이자 헤로디아스의 동생이었던 아그립바 1세(빚이 많이 있었음)와의 갈등으로 결별. 아그립바는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칼리굴라와 친분을 갖고 있었고, 칼리굴라가 하루 빨리 황위에 오르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고,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감옥에 갇혔음. 그런데 칼리굴라가 제위에 올랐을 때, 아그립바는 감옥에 풀려나 새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까지 얻게 됨. 이에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 황자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요청은 묵살되었고 통치자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추방 당하였고(아마도 갈리아 지방), 그는 그 곳에서 숨을 거두게 됨.
빌립은 갈릴리 호수 동부와 북동부 지역을 다스렸던 분봉왕이었음.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빌립보 가이사랴는 그가 건설했던 도시로서 요단강의 발원지인 파니아스였음. 그리고 세례 요한과 헤롯 안티파스가 결혼 문제로 대립할 때, 빌립이라는 이름이 언급되고 있음. 빌립은 헤로디아스와 빌립1세의 딸인 조카 살로메와 혼인을 하였음. 이 살로메는 세례요한을 참수한 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음.
그는 헤롯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통치를 했던 것으로 여겨짐. 그는 조용한 통치를 하다가 34년에 숨을 거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