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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불루스 1세 (104-103)
-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정은 아리스토불루스가 열었다고 볼 수 있음. 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으며, 자신의 정적이라 여겼던 모친을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게 했으며, 동생 안티고노스의 죽음에는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동조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친과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왕위에 오른지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 그는 친헬라적인 행보를 보였고 헬라 문화를 유대 내에 정착시키는데 집중하였다. 이런 면에서 마카비 가문의 반헬라적인 행보와는 다른 정책을 폈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스키토폴리스(벳산) 너머의 북부로 국경을 확장했고 이두레아 사람들(Itureans, 아마도 아랍 유목민)을 정복하고 유대화 시켰다. 히르카노스가 보다 정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을 가진 사두개파와 결탁하였고, 이러한 영향이 하스모니안 왕조의 방향성을 전환하게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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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얀네우스 (103-76)
-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에 의해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음. 아리스토불루스는 자신의 아내 살로메로 하여금 자신을 계승하게 했으나, 살로메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얀네우스를 석방시키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 그리고 얼마후 살로메는 얀네우스와 결혼하고 왕으로 추대.
- 얀네우스 역시 친헬라적인 정책을 고수했고, 사두개파를 지지함. 그는 갈릴리와 블레셋, 요단강 건너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함.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프톨레미 9세 소테르(라티루스)와의 충돌이 있었음. 당시 프톨레미는 모친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키프러스(Cyprus)를 다스리고 있었음)
- 얀네우스는 바리새파와 충돌하게 됨. 바리새파가 얀네우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자(초막절 때, 시트론 가지를 던짐), 그는 6000명이나 되는 동족을 살해하였음. 그리고 제단과 성전 사이에 분리벽을 세워 제사장들만 들어오게 함. 그리고 자신의 첩들과 잔치를 즐기며 자신에 반대하는 주모자 80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함.
- 그는 요단강 건너 라가바(Ragaba) 요새를 공격하다가 죽게 됨.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권력 일부를 이양하고 관계를 회복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며 죽음.
- 한편 셀루커스 왕조는 점점 영토를 잃어가고 있었고 북쪽의 폰투스(Pontus) 왕국과 로마 사이에서 근근이 버티다가, 폰투스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위인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가 기원전 83년 셀루커스 왕조를 차지함으로 실제로 셀루커스 왕조는 무너짐.

- 살로메 알렉산드라 (76-67)
- 얀네우스가 죽은 후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가 왕이 되어 통치함. 유대 역사상 최초의 합법적인 여왕. 그는 남편의 유언대로 바리새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지지를 얻게 됨.
- 남편과는 달리 평화로운 정치를 펴게 됨. 그녀는 장남 히르카노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고 바리새인들에게 정치적인 권한을 줌. 특히 그녀는 애굽 출신 유대교 랍비인 타배(Tabbai)의 조력을 받음. 그는 중요한 개혁 시도 - 추방된 바리새인들과 투옥된 바리새인들을 요직에 등용, 유대교의 예식 회복, 성전 유지를 위한 인두세 부과(사두개인들로부터 인계받은 유지권을 보호하기 위함), 모든 유대인 자녀들에게 의무 교육 제공.
- 알렉산드라의 통치 기간 동안 산헤드린 공의회의 권한이 크게 강화됨.
- 아리스토불루스 2세 (67-63)
- 알렉산드라의 통치 기간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히르카노스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됨. 그러나 그는 병약하였고 권력욕이 많지 않았음. 이에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이가 아리스토불루스 2세였는데 그는 사두개파의 도움을 받아서 반란을 시도하고 권력을 찬탈하려고 함. 반란을 일으킨지 보름만에 22개의 요새를 손에 넣게 됨. 히르카노스 2세는 자신의 직위를 내어 놓아야 할 상황에 처함.
- 이 때 헤롯의 부친이었던 안티파테르(Antipater)가 중재에 나섬. 그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자신의 직위를 박탈할까 두려워 히르카노스 2세에게 왕위를 탈환해야 한다고 설득. 그리고 나바티안의 왕 아레타스 2세의 도움을 받아 안티파테르와 히르카노스 2세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제압하고 예루살렘의 감옥에 감금. 그리고 이후에 또 다른 내란이 발생했고, 63년까지 지속됨.
- 이 때 로마가 유대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 당시 로마는 공화정 말기였고, 유력한 권력자들 사이에서 절대 권력을 두고 분쟁 가운데 있었음. 그 가운데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해적 소탕에 대한 전권을 받고 지중해 원정을 단행하였으며, 동방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상황 가운데 있었음.
- 이 때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노스 형제는 서로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폼페이우스는 이를 기회로 삼았음. 그는 자신의 장군인 스카우루스(Scaurus)를 이 곳에 보냈고, 그는 더 많은 뇌물을 제공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지지. 그리고 스카우루스는 아레타스에게 유대로부터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적대행위를 금지함.
-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폼페이우스를 믿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킴. 이에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기원전 63년에 에루살렘 성전을 점령. 이에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됨. 폼페이우스는 성전의 지성소로 진군하지만, 성전을 둘러만 보고 철수.
- 이로 인해 하스모니안 왕국에 귀속되었던 영토들이 독립. 사마리아 성이 회복되어 재건되었고 세바스테(Sebaste)라는 지명을 받게 됨.
- 결국 히르카노스 2세는 대제사장과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차남 안티고노스를 로마로 데리고 감. 나중에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로마에서 탈출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폼페이우스의 세력에 의해 살해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