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성서학의 역사에 있어 비평적인 해석 방식의 단초가 된 본문이기도 하다. 창세기 내에 복수의 자료들이 편집되어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제적인 예시를 통해 체계적으로 제안한 이가 바로 아스트뤽(Astruc)이다. 스피노자나 토마스 홉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성서가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이에 모세 저작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아스트뤽은 모세 저작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편집가설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3장에 이르는 본문을 분석하고 있다. 출애굽기 3장 이후는 모세가 성인이 된 이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아스트뤽이 보기에 이 부분은 모세가 저작한 것이 확실하지만,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역사가 어떻게 모세에 의해 쓰여질 수 있었는가가 주된 의문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스트뤽은 이후 역사비평론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방법론적인 통찰을 제안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세가 저자였음과 동시에 “수집가” 였다는 것이다. 이미 이전에 존재했던 복수의 자료들(심지어 대치되어 보이는)을 일관적으로 편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복수의 자료들의 증거와 모세에 의한 일관된 편집의 흔적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스트뤽은 아주 기초적인 문서가설 방법론의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가 히브리어 성서 본문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문서가설 이론은 이후 성서학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스트뤽은 매우 보수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성서 연구 방법론을 통해서 그의 주장을 관철했다는데에 가치가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인간을 통해서 전수되고 형성되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후 독일 학계를 중심으로 창세기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러한 “자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관심의 초점을 두게 된다. 이후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신명에 따라 하나님(Elohim)을 사용하는 문서를 E문서, 그리고 야웨(Jahweh)라는 신명을 사용하는 문서를 J문서라고 명명하여 구분했다.[1]
이러한 가운데 소위 4문서설의 기초를 확립한 학자는 헤르만 훕펠트(Hermann Hupfeld)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최종적으로 E를 하나로 보았지만 E (Elohistic) 문서가 본래 두 자료들(sources), 즉 오래된 E(Priestly, 종교적인 법들)와 늦은 E(Elohist, J와 대응하는 네러티브)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늦은 E는 완전한 내러티브가 아니고(아브라함 중간에서부터 시작), 오래된 E를 보완하기 위한 개념. 그리고 그는 오경의 근간을 종교적인 법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J와 E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드러냄으로 E와 J는 두 다른 전통을 보존하려고 했던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결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료들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E1E2JD (PEJD)
Hermann Hupfeld (31 March 1796~24 April 1866)
그리고 그는 오래된 E와 늦은 E를 별개의 문서로 보았고, 훕펠트가 제안했던 자료의 연대기를 뒤집어서 JEDP라는 20세기 동안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4문서설의 모델을 제안했던 학파는 Graf-Wellhausen 학파이다. 이들이 주장한 이론은 벨하우젠의 저서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Julius Wellhausen (17 May 1844~7 January 1918)
이들이 당시 성서학계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방법론적인 견해는 바로 종교사학적인 관점에서 오경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 관점은 19세기 당시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낭만주의 사조는 이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인간의 삶 역시, 이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의해 변화해 나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즉, 글로 쓰여진 텍스트 이면에는 당대의 역사적인 정황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이야기에 현재의 상황이 투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원래 본문”은 어떤 형태였으며, 이 원래 본문을 포함하고 있었던 더 큰 맥락의 본문은 무엇이었으며, 왜 이 텍스트는 변형되었는가?
이전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법”이 보다 고대적인 것이고 이와 관련된 “네러티브”가 보다 후대의 문서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벨하우젠은 이를 다르게 보았다.
그가 그의 방법론을 내세움에 있어 중요한 모델이 되는 문헌은 바로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였다.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두 “역사책”이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열왕기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혹은 지역적인 성소에서의 제사를 반영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서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를 강조하고 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분기점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바벨론 포로기이다. 벨하우젠은 바로 바벨론 포로기가 진정한 의미의 유일신 신학이 정립된 시기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각종 제사법과 중앙 성소(성막으로 표상되어 있는)를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제사장 문서(P)는 포로기 동안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한다.
벨하우젠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종교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초기 이스라엘은 다른 가나안 국가들과 크게 차별되지 않은 다분히 미신적이고 다신교의 영향을 받은 사회였으나 예언자 시대와 신명기 종교개혁 시대를(히스기야, 요시야) 거치고 나서야 유일신 종교화가 이루어져갔고 온전한 유일신 신앙은 포로기 이후에야 정립 되었다고 보고 있다(*그는 또한 성막 역시 역사적 실재가 아닌 이상적인인 종교 공동체(church)의 표상이라고 보았음). 즉, 그는 미신적인 종교에서 토라법을 중심으로하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의 발전(evolution)을 주장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유일신 종교의 핵심적 경전인 토라 율법을 형성한 이들은 예언자들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구조는 당시 독일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헤겔의 정/반/합의 역사 구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벨하우젠 스스로는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벨하우젠은 중앙 성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종교 의례는 현실적이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유대교 출신 학자들에게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으로 비춰지기도 했다.[2] 아무튼 그가 주장한 4문서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