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기원전 63-43년 동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반목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였음. 유대 역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의 왕위 다툼이 있었음. 이 시기 안티파테르는 권력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히르카노스 2세의 편을 들어 아리스토불루스를 견제하고 왕위에서 끌어내려 하였음. 아리스토불루스는 폼페이우스와 친선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믿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을 당하고 그의 아들과 함께 로마로 압송당하고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를 대제사장이나 유대의 왕으로 지지. 이후 아리스토불루스가 아들 알렉산더와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재기를 노렸지만 진압당하게 됨.

결국 로마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고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살해 당함. 이 내전 동안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카이사를 지지했고,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아 유대로 돌려 보냈으나 폼페이우스의 새력에 의해 독살.

폼페이우스의 죽음 이후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에 도움을 줌. 전쟁 이후 카이사르는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히르카노스 2세의 지위를 인정.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로부터 유대 행정 장관직을 얻게 되었고(기원전 55),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하고, 갈릴리 지역은 둘째 아들인 헤롯이 통치하게 함. 헤롯은 북쪽 수리아 지역의 도적떼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얻게 됨.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들의 권력을 두려워했던 유대의 유력 인사들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히르카노스 2세를 부추겼고, 공의회의 허락 없이 도적 떼들을 처형한 일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며 헤롯을 공의회에 출석시킴.

헤롯은 경비병을 동원하여 공의회에 출석했고 그의 위압적인 모습에 헤롯에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함. 다만 당시의 의인이었던 사메아스만 헤롯을 비난. 히르카노스 2세는 헤롯을 다마스커스로 은밀히 피신시켰고, 헤롯은 당시의 총독이었던 섹스투스 카이사르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수리아 사령관 자리를 얻게 됨.

히르카노스 2세의 측근이었던 말리쿠스는 안티파테르 1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움. 말리쿠스는 히카노스 2세의 집사를 통해 음식물에 독약을 넣어 안티파테르를 독살시킴. 이를 안 헤롯은 말리쿠스를 유인하여 제거.

한편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다른 아들 안티고노스가 유대로 돌아옴(57). 나중에 그는 헤롯을 공격(42). 헤롯은 안티고노스와 전투를 벌여 유대 밖으로 내보냄.

당시 로마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시우스의 3두 정체 체제에 있었고 내분이 시작되던 때였음. 먼저 기원전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빌립보에서 카이우스를 격퇴시킴.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골 지역으로 진격하고, 안토니우스는 아시아 지방을 차지. 안토니우스는 수리아의 길리기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남.

안토니우스는 유대의 유력자들과 만남을 가졌고, 이들은 헤롯과 측근들을 고소했으나 히르카노스 2세가 헤롯을 두둔했고, 이에 안토니우스는 헤롯과 파사엘을 분봉 왕으로 임명. 히르카노스 2세는 대제사장직만 유지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42년 파르티아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유대를 침공. 40년에 안티고노스는 예루살렘을 함락. 헤롯의 형 파사엘은 체포되었고, 자결함. 안티고노스는 히르카노스가 다시 대제사장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를 절단시킴.

헤롯은 모친과 가족들을 데리고 아라비아로(페트라) 향하였음. 그 과정에서 마차가 뒤집히면서 모친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헤롯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자결하려고 함. 주변 사람들이 이를 만류하였고 다른 이들과 함께 마사다로 피신. 헤롯이 자결하려 했던 장소에 훗날 헤롯이 자신의 무덤을 건설(헤로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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