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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종교 탄압이 지속됨. 이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은 유대인들과 다름을 강조함. 요세푸스의 기록(고대사 12권 5장)에 따르면 사마리아인들은 자신의 선조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시돈인들이라고 말하고, 그리심산 성소를 쥬피터 헬레니우스 신전이라 불러줄 것을 왕에게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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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인의 마타디아스 (167-166)
- 아사모네우스(Asamoneus)의 증손. 이 이름에서 하스모니안(Hasmonean) 명칭이 파생됨.
- 안티오쿠스 4세의 명령에 따라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강요하는 왕의 관리들이 모디인에 도착하였고 마타티아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요구.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제사를 드리는 한 유대인을 죽이고, 제단을 둘러 엎은 이후, 아들들과 함께 사막으로 피신. 왕의 군대는 일부러 안식일에 공격을 했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함. 마타디아스와 함께 했던 유대인들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웠고 마타디아스는 안식일에도 필요하다면 싸울 것을 제안. 마타디아스는 1년 후에 시몬에게 정신적인 지도력을, 그리고 유다 마카베오에게 군사 지도권을 넘겨 주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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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마카비우스 (165-161)
- 마카비우스는 ‘망치를 든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다의 별명이었음. 유다 마카비우스를 통해 독립왕조의 기틀이 세워지게 됨.
- 수리아의 총독 아폴로니우스가 유다의 군대를 진압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수리아의 장군 세로(Seron) 또한 벧호론에서 유다에 패배를 당하게 됨.
- 이 때 안티오쿠스 4세는 리시아스를 남겨두고 동부에서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하고 있었음. 리시아스는 니카노르와 게로으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세워 군대를 보냈지만 유다의 급습에 패배 (164년)
- 164년 유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 하누카 축제(수전절)가 열림.
성전등대에 관한 탈무드 이야기: when it came time for the rededication of the Second Temple, only one day’s worth of pure oil was found to use in the temple’s menorah—which was meant to burn all night every night—but miraculously the oil burned for eight days. This gave enough time to collect a fresh supply of oil and, with the belief that a miracle from God had occurred, a reason to celebrate for a full eight days.
- 유다의 군사적인 성공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해방하였고, 또한 북쪽과 남쪽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들을 지원.
-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동부전선에서 전사(164). 그의 어린 아들(7살, 훗날 안티오쿠스 5세 유파토르)은 필립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 유다가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아크라 성채를 차지하자(*이 성채의 군사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공격했기 때문) 리시아스는 10만의 보병과 2만의 기병, 32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섬 (1마카 6:30ff). 이 전투에서 엘르아살이 전사했고, 유다는 요새로 몸을 피함. 그러나 당시 필립이 자신에게 민심을 쏠리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리시아스는 유대인들과 협상을 함. 토라의 권위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 그리고 유대인들의 소요의 원인중 하나였던 대제사장 메멜라오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친수리아 성향의 알키무스가 대제사장이 됨.
-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하시딤은 더이상 유다를 지원해 주지 않게 됨. 유다는 친수리아 성향의 알키무스를 예루살렘에서 축출했고, 알키무스는 이에 셀레쿠오스 4세의 아들인 수리아왕 데메트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 데메트리우스는 그의 휘하 장수 바키데스를 보냈고 유다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고 알키무스가 재집권에 성공. 바키데스의 사령관 니카노르는 회유책을 써서 유다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유다는 이러한 계획을 알고 빠져 나갔으며 이 둘은 벳-호론 근처 아다사에서 격돌하였고, 니카노르는 전사하게 됨.
- 유다는 로마에 사자를 보내어 수리아군을 격퇴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마에 갔던 사자가 돌아오기도 전에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 이시기 유대인들은 마카베오파, 하시딤, 그리고 헬라파로 나뉘어지게 된다. 유다의 사후 헬라파가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 알키무스가 대제사장이 되어 친헬라파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을 구분했던 성전의 담을 제거. 마카베오 일가는 거의 괴멸 수준에 이름. 유다의 형제 가운데 요나단과 시몬이 살아남았으며, 유다의 자리를 요나단이 이어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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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 (160-142)
- 7년 동안 예루살렘은 친헬라파의 관리하에 있었음. 요나단은 소규모의 전투만을 수행. 그런데 153년 수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됨. 당시 왕위를 계승했던 데메트리오스 1세(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그리고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 알렉산더 발라스 사이에 분쟁. 발라스는 로마와 이집트를 포함하여 주변 나라들의 지원을 받게 됨. 이들은 요나단에게 군사력을 요청하는 대가로 특권을 제시. 요나단은 발라스의 제안을 받아들임. 데메트리우스는 결국 패배하고 살해당함. 이에 발라는 자신을 지원했던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또한 왕을 상징하는 자주색 옷과 금관을 보내줌.
- 이 때, 요나단은 ‘대제사장직’과 ‘왕’을 겸하게 됨. 물론, 정치적인 독립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하였고 수리아 왕의 비호를 받고 있던 상태였음.
- 대제사장 오니아스3세의 아들인 오니아스 4세는 애굽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에게 자신을 위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음. 그는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성전을 짓게해 달라고 왕에게 요청했고 이 성전을 건축하게 됨. 그는 이것이 이사야 19:19의 성취라고 보았음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 데메트리오스 2세가 당시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발라스를 공격하였고, 발라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주하던 중에 사망.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가 수리아 제국의 통치자가 됨.
- 수리아가 전쟁 중에 있을 때, 요나단은 예루살렘 주변의 성읍들을 공격하여 점령함으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함. 데메트리우스 2세는 요나단에게 군사 행동을 멈추라고 요구하였고 요나단은 수리아 왕과 화친. 화친의 조건으로 발라스로부터 받았던 모든 특권을 유지.
- 요나단은 특유의 외교적 수단을 발휘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하고 영토를 확장.
- 그러나 수리아에서 다시 분쟁이 발생했고 꼭두각시왕 안티오쿠스 6세의 후견인이었던 트리포가 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요나단을 협상을 핑계로 불렀고, 그를 제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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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14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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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디아스의 둘째 아들로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아들. 마카베오 1서는 트리포의 위협 가운데에서 시몬이 백성들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음.
나와 내 형제들과 내 아버지의 집안이 율법과 성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겪은 전쟁과 고통이 어떠하였는지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 때문에 내 형제들이 모두 이스라엘을 위하여 죽고, 나 혼자 남았습니다. 나는 내 형제들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 나는 어떠한 고난의 때에도 내 목숨을 결코 아끼지 않겠습니다. 모든 이민족들이 악의에 차서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모였습니다. 나는 반드시 내 민족과 성소와 여러분의 아내와 자식들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성의 사기가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유다와 당신의 아우 요나탄 대신에 이제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우리의 전쟁을 맡아 싸워 주십시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마카베오상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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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모디인에 자신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기념하는 피라미드 일곱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우고 무덤을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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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포가 안티오쿠스 6세를 배반하여 죽였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왕위에 오르게 됨. 이에 시몬은 데메트리오스 2세와 협정을 맺고, 세금을 면제받도록 약속을 받음. 그리고 독립국가로서 인정을 받게 됨. 비록 내전중이기는 했지만, 142년에 헬라 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지도자가 시몬이었음.
백칠십년(*이 연대표기는 셀레쿠오스 연대기를 기준으로 함. 기원전 312년이 1년)에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백성은 모든 문서와 계약서에 ‘유다인들의 총독이며 지도자인 시몬 대사제 제일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 (마카베오상 13:41-42)
- 데메트리오는 트리폰의 반란을 틈타 수리아를 위협한 파르티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포로로 잡혀가게 됨 (138). 그는 나중에 석방되어서 130년부터 다시 수리아의 왕이 됨. 트리포는 데메트리오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이된 그의 형제 안티오쿠스 7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임을 당함.
- 한편 시몬은 독립적인 나라의 기반을 만들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영토를 회복하는일에 주력하였음. 그는 쉐펠라 지역의 요새를 탈환하고,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장악.(*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7세와 군사적 충돌을 하게 됨) 그리고 141년에 아크라 요새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 그리고 다른 한편 로마와 협정을 맺어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공고히 함. 그리고 자국의 주화를 발행하였고 141년부터 돌깁적인 자국의 주화가 사용되기 시작.
- 기원전 135년 시몬이 여리고 평원의 도크(Dok) 요새를 시찰하다가 그와 그의 두 아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던 사위 프톨레마이오에 의해 살해됨. 그리고 시몬의 부인 역시 인질로 잡혀 있다가 살해됨.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몬의 남은 아들 요한도 살해하려 했으나 도피하여 실패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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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히르카노스 1세 (134-104)

Judea, Hasmoneans. John Hyrcanus I (Yehohanan). 135–104 BCE. Æ Prutah (13mm, 2.02 gm, 12h). "Yehohanan the High Priest and the Council of the Jews" (in Hebrew) in five lines within wreath / Double cornucopia adorned with ribbons; pomegranate between horns; small A to lower left. Meshorer Group B, 11; Hendin 457.
- 그는 살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제사장의 직임을 이어 받음. 사실상 시몬 조차도 왕이 칭호를 사용하지는 못하였음.
-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7세는 시몬이 죽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고, 유대를 다시 수리아의 종속된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히르카노스는 안티오쿠스 7세에게 배상금과 자신의 형제들을 포함한 인질을 내주어 수리아 군을 돌아가게 함.
- 안티오쿠스 7세는 파르티아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고, 요한은 이를 도와주었음. 파르티아는 수리아의 내분을 위해 데메트리오스를 석방하였고 왕위 경쟁을 하게 함. 그러나 안티오쿠스 7세는 금새 패배하여 전사. 이후 데메트리오스가 두 번째로 재위를 회복하게 됨.
- 히르카노스 1세는 안티오코스 7세가 죽은 후 외부의 간섭 없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 과거 솔로몬의 영토만큼 확대. 그는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방에 원정을 단행하였고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 그리고 그는 이두매인들에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고, 할례를 시켰음. 이 과정에서 유대로 편입된 가문에 바로 안티파테르 가문이었으며, 그 가운데 나중에 하스모니안 왕조를 무너뜨리게 되는 헤롯이 있었음.
- 히르카노스 시대에 분파들이 생겨나기 시작. 바리새파,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과 히르카노스 사이에 갈등이 촉발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음(고대사 13.188-296). 바리새인들은 히르카노스의 모친이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가운데 몸이 더렵혀 졌음을 주장하며 대제사장직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 이것은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히르카노스가 갖고 있었던 대제사장직과 정치적인 왕이라고 하는 이중직에 대한 문제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입장이 생겨났을 것. 이에 분노한 히르카노스는 보다 정치적이고 귀족적인 분파인 사두개인들을 지지하였고, 바리새인들이 만든 종교적인 법규들을 철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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